유용한정보 / / 2025. 9. 14. 13:29

전통인가 코스튬인가 : 퓨전 한복에 흔들리는 한복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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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경복궁 앞을 지나가다 보면 알록달록한 한복 차림의 관광객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고궁의 장엄한 풍경과 어울리는 듯하면서도, 자세히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 한복과는 거리가 있는 경우가 많다. 금박이 번쩍이는 치마, 시스루 저고리, 드레스풍의 퍼지는 실루엣까지. 이른바 ‘퓨전 한복’이라 불리는 이 복장이 지금 관광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선택지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물론이고 젊은 국내 방문객들도 “사진이 잘 나오는 옷”을 찾는다. 고궁을 배경으로 SNS에 올릴 인생샷을 찍기 위한 의상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각적 효과가 강조된 퓨전 한복이 시장을 장악해 버렸다. 지난해 경복궁을 찾은 방문객 중 한복을 입은 사람은 172만 명에 달했는데, 그중 상당수가 퓨전 한복을 착용했다는 통계는 지금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퓨전 한복,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전통 한복은 치마와 저고리, 혹은 바지와 저고리라는 기본 구조를 갖는다. 길고 넉넉한 선, 여유로운 주름, 은은한 색감이 특징이다. 반면 퓨전 한복은 이를 토대로 하면서도 과감한 변형이 가해졌다. 저고리는 짧아지고 치마는 짧아져 미니스커트에 가깝거나, 반대로 드레스처럼 과도하게 퍼지기도 한다. 금박이나 반짝이 장식이 옷 전체를 덮는 경우도 많다.

소재도 달라졌다. 전통 한복은 비단, 모시, 명주 같은 천연 섬유를 중심으로 만들어졌지만, 요즘 대여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퓨전 한복은 플라스틱 같은 인조 섬유가 많다. 값싸고 화려하게 보이지만, 오래 입기 어렵고 세탁에 취약하다. 일부는 중국산 원단으로 제작되면서 ‘한국의 전통 옷’이라는 정체성을 더 희미하게 만든다.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소비 문화가 있다. 여행객들에게 한복은 ‘문화 체험’보다는 ‘사진용 의상’으로 여겨진다. 전통적 가치보다는 인스타그램에 어울리는 색감과 장식이 선택의 기준이 된 셈이다.


전통을 훼손한다는 목소리

 

이런 흐름에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전문가들은 “퓨전 한복이 관광상품으로 기능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지나치게 변형되면 전통을 왜곡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일부 의상은 서양 드레스나 중국 전통 복식과 혼동될 정도다. 외국인들이 이런 옷을 전통 한복으로 오해한다면, 한국의 문화 이미지를 왜곡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2018년 종로구청은 한때 지나치게 변형된 한복 대여를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당시 구청장은 “한복이라 부르기 어려운 수준까지 변형된 경우가 많다”며 개선 필요성을 언급했다. 하지만 제도적 규제는 흐지부지됐고, 지금도 대여점마다 ‘보여주기용’ 의상이 쏟아지고 있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복 디자이너 황이슬은 “전통과 퓨전은 공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 한복인 박술녀는 “현대화는 필요하지만, 기본 틀을 무너뜨려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같은 업계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어디까지가 한복인가, 기준이 필요하다

 

 

한복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다. 조선시대에도 왕실과 민간, 지역과 계층에 따라 형태와 색이 달랐다. 따라서 퓨전 한복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분별한 변형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도 위험하다. 문제는 사회적 합의와 기준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국가유산청은 “한복생활”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면서 한복의 정의를 명시했다. 치마와 저고리, 바지와 저고리라는 기본 구조, 옷고름과 고름 매듭, 착용 순서 등은 전통 한복의 핵심 요소로 꼽힌다. 이 기준을 토대로, 무엇이 전통 한복이고 무엇이 단순 체험용 의상인지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관광객을 위한 체험복은 체험복대로, 전통 한복은 전통 한복대로 공존할 수 있다. 문제는 이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한복’이라는 이름으로 소비되는 현실이다. 그 과정에서 전통의 이미지가 변형되거나 왜곡된다면, 결국 한국 문화 전체가 손해를 보게 된다.


전통과 변화 사이,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

퓨전 한복은 한복의 대중화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누구나 쉽게 빌려 입고, 즐겁게 사진을 찍고,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으니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하지만 전통이라는 뿌리를 잃어버린 대중화는 공허하다.

지금 필요한 건 규제가 아니라 방향 설정이다. 대여업체의 품질 관리, 전통 한복 대여점에 대한 인증 제도, 고궁 무료입장 혜택 조건에 전통성 기준을 반영하는 등의 장치가 필요하다. 동시에 박물관이나 문화센터에서 전통 한복 체험과 교육 프로그램을 활성화하면, 사람들은 더 깊이 이해하고 즐길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건 선택이다. 단순히 화려한 사진을 남기기 위한 의상일지, 한국의 역사와 미학을 담은 복식일지는 입는 사람과 사회가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다. 전통과 변화가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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